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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왕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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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에 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울산에 퍼져 있는 이야기이다. 울산시 두왕동(斗旺洞)에 있는 이 산등(山嶝)은 국도 31호선 감나무진사거리에서 두왕사거리 구간 접하여 바로 그 서편에 남으로 면하여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여기에는 몇기의 묘지로 되어 있다.

이 대마도주등에 관한 내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울산시 두왕동에는 감나무진이란 곳이 있다. 오래전부터 외황강(外隍江)에는 9개의 나루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의 한 나루가 감나무진이며, 이 나루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는 대나루(大津)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감나무진의 나루터에는 울산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기에 자연 사람의 왕래가 있어 여기에 주막도 생겨 행인이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때는 고려 때의 일이었다. 울산시 두왕동 당랑 끝에 9남아를 둔 김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한 분 살고 있었다. 당랑끝은 이 김씨가 9남아를 데리고 살았다고 하여 일명 구남밭터라고도 세인들은 불러 왔다 한다. 그런데 하루는 불행하게도 친상을 당하여 상재의 몸이 되었다.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그는 묘 터를 구해 보았으나 살림살이가 궁색한 터라 쉽사리 마음에 드는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집 가에 토롱(土壟)이라고 하는 가장을 하여 두고 좋은 묘터가 구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지나가던 중 하루는 꿈에 백발의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네가 너의 아버지의 좋은 유택을 얻으려거든 배암골 감나무진에 있는 객주(客主, 여관)집을 찾아가서 그 집의 머슴이 되라.”고 하고는 어디론지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이 꿈에서 깨어난 김 씨는 한동안 어리둥절하다가 망설였다.

아버지의 초상도 치르기 전에 또 남의 집의 고용살이를 하라 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진 않았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이 이상하였다. 좋은 유택을 얻으려거든 배암골 감나무진으로 찾아가서 머슴이 되라? 이 말을 다시 생각하면서 집안을 정리하고는 불과 1km도 안 되는 감나무진 객주집을 찾아가서 간신히 그 집의 머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어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아버지의 묘 터를 구하는 일념에 젖어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상재가 아마 풍수 같은 사람을 데리고 이 객주집을 찾아 투숙하면서 수일 동안 근방 산천을 두루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동정을 알게 된 김씨도 자연 그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몇일이 지나자 하루는 두 사람이 소곤거리더니 밤중인데 김씨를 불러 계란 두 개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김씨의 머리에는 어떤 육감이 번개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계란 두 개를 구한 김씨는 이 계란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다시 찬물에 식게하고는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그런 뒤에 김씨는 잠이 들어 한동안 자고 있었는데, 전일의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네가 이렇게 잠이 들어 있을 때가 아니니 빨리 일어나라 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노인의 말에 깜짝 놀란 김씨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니 밖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는지라 살그머니 살펴보니 상재와 풍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김씨도 살짝 나서서 그 두 사람의 뒤를 멀리서 뒤따라가니 불과 얼마 가지 않은 한 산등에 이르러 두 사람은 땅을 파고 무엇인가 묻고는 일어나서 다시 객주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를 본 김씨도 지름길로 먼저 돌아와서 자리에 들었다.

이윽고 새벽동이 틀 무렵에 두 사람은 다시 그 산등으로 가서 밤중에 와서 무언가 묻었던 자리를 다시 파면서 고개를 저으며, 크게 의아한 몸짓을 하면서 틀림없을 텐데라고 몇 번을 연발하더니 객주로 돌아와서 그 길로 어디론지 가 버리고 말았다.

손님들이 떠나고 난 뒤 김씨는 생계란 두 개를 초저녁에 그 산등을 찾아가서 묻어 두었다가 밤이 샐 무렵에 다시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서 계란 한 개가 부화하여 닭이 나래를 치며 목을 쭉 빼더니 꼬곡꼭꼬하고 크게 우니 온 산천이 새벽의 적막을 깨고 메아리쳤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김씨는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드렸는데, 그 묘는 평토장(平土葬)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이 김씨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고려에 벼슬하다가 대마도로 건너가 아비루(阿比留)를 멸망시키고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되니 이 사람이 바로 소오씨(宗氏)라는 것이다. 이후로부터 김씨의 아버지 묘가 있는 산등을 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의 이름도 이와 관련지어 도왕동(道王洞)이라 하다가 임금 왕(王) 자(字)를 쓰는 것은 왕을 거역한다고 하여 왕성할 왕(旺) 자로 고치고 길 도(道) 자 대신 말 두(斗) 자를 사용하여 오늘의 두왕동(斗旺洞)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주였던 소오씨가 과연 이러한 전설에 나타나는 대로 김씨의 후손인지는 상당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의 향토사 연구가 나가도매히사애의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섬 고대사의 열쇠 쓰시마」에 의하면 1246년이 저물 무렵 고래무내시개히사가 군을 이끌고 건너와 이듬해에 아비루(阿比留)를 멸하고 섬이 실권자가 되니 이 사람이 소오(宗)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고래무내시개히사의 선대에 관하여도 해이개의 일족이라 하였으며, 메이지(明治) 때에 이르러 이들은 스스로 안도구댄노오의 후손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료들을 미루어 보며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은 의문이 많으나 사실 대마도주등에 관한 전설은 우리측 일본 사람들이 전해 왔으니 토호인지 그렇지 않으면 기우슈우나 이기섬과의 관계가 있는 이야기인지 더 연구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내에 있는 김씨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울산시 상개동(上開洞)에 10여호 살다가 지금은 흩어지고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야기의 분묘도 팔괘형(八卦形)의 석조물이 있었던 것을 해방 후 청량지서의 방축벽을 쌓을 때 이 묘석을 가져가서 쌓은 까닭으로 지금은 석조물은 볼 수 없고 평장묘만 남아 있다.

또 일설에는 1910년경에 일본 사람이 이 근처에 배미골이 있느냐고 찾아온 일이 있고, 비석도 만들어 가지고 왔으나 묘를 찾지 못하고 물속에 던지고 되돌아갔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 참고자료 : 두왕동 마을지(울산남구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2013. 3)

  • 담당부서 :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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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화번호 : 052-226-5413
  • 최근 업데이트: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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