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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

이유수 선생의 「염정(鹽政)」(울산문화 11집, 1995)에 따르면 울산은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염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울산지방에 전해오는 옛말에 “추풍남 이남 사람치고 울산소금 안 먹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이 울산 쪽의 수요를 채워 주었던 것은 물론 영남 일대에까지도 능히 그 공급을 하였던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권79 식화2 염법 충선원 원년에 조사한 도별 염분(鹽盆)과 염호(鹽戶)에 따르면 경상도에는 염분(鹽盆) 174군데, 염호(鹽戶) 195군데가 있었다고 하나 울산 지방의 수치는 알 수 없다. 이러한 고려의 염정(鹽政)과 관련지어 울산 지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이첨(李詹)이 쓴 고읍성기(신증동국흥지승람 울산군 고적 고읍성)를 통해서 풍부하게 소금이 생산되었던 것만은 알 수 있다.

울주는 옛 흥려부(興麗府)이다. 산과 바다가 깊기로는 동남쪽에서 제일 장관이다. 본래부터 말하기를 땅이 기름지고 또 물고기와 소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백성 중에 앉아서 부자가 된 자가 여러 집이 있으므로 인해서 군국(軍國)에 쓰이는 비용이 여기서 나는 것이 여러 천금에 이르렀고, 해산물을 바치는 것도 또한 적지 않았다. 대개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모이고, 백성들이 모여야 세금이 많아지며, 세금이 많으면 국가의 자원되는 것이 간절하고 필요하다.”

위의 기문(記文)을 통해서 물고기와 소금의 생산을 통해서 부자가 된 자가 여러 집 있었고, 군국(軍國)에 쓰이는 비용도 여러 천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료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울산에 염창(鹽倉)을 두고 있었던 것을 본다면 고려 때에도 이곳에 염창(鹽倉)이 있어 소금의 집산(集散)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울산 소금은 달천의 쇠와 함께 근대산업의 근간으로 1,000년이 넘는 세월 하루같이 함께 해 왔지만 울산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그 가치조차 평가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동안 달천철장의 철과 쇠부리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뤄졌으나 울산의 소금산업에 대한 자료는 체계적으로 취합·정리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거론돼 왔다.

(사)영남알프스천화 배성동 이사장(소설가, 시인)에 따르면 울산은 삼각주가 발달하고 조수 간만의 차가 적어 ‘신이 내린 소금단지’라고 불릴 만했다. 배 이사장은 울산 지역의 소금 역사가 최소한 1,5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지난 2004년 울산문화재연구원이 북구 효문동 밤나무골 석곽묘에서 용기 하나를 발견했는데, 학자들은 염기가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용기가 삼한시대의 소금단지일 것으로 분석했다.

이후 고려 말에는 설곡 정포가 삼산동 일원의 염전을 바라보며 ‘벽파정’이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삼산 염전의 모습이 서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산팔경 중의 하나로 ‘염촌담연’을 꼽았다. 삼산염전에 소금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좌병영지도에는 푸른 연기가 그려진 염막 4곳이 보이는데, 그 위치가 현재 태화강역 자리다.

근대에 들어서 울산에는 크게 4곳의 염전 지대가 형성돼 있었다. 삼산동 일대의 삼산염전, 돋질산 일대의 돋질염전, 명촌 일대의 명촌·대도염전, 청량면 외황강 일대의 마채염전 등이 그것이다.

1918년 울산만 일대의 염전

울산은 여러가지 소금 가운데서도 ‘달인 소금’ 혹은 ‘졸인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자염(煮鹽)을 생산했다. 자염은 흙에서 일구어내기 때문에 토염(土鹽)이라 불리기도 했다.

울산 최대의 염전이었던 삼산염전은 1920~1931년 사이 울산비행장 등이 만들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돋질염전은 한국비료(현재의 삼성정밀화학), 대한알루미늄(현재의 노벨리스코리아) 공장에 편입돼 1965년 말께 사라졌으며 명촌염전은 현대자동차가 들어서면서, 마채염전은 공단이 조성되면서 사라졌다.

이 가운데 마채염전과 가까운 소규모 염전인 ‘사평 깔분개’ 에는 지난 1979년 한주(주)가 들어서 국산소금을 생산하면서 큰돈을 벌기도 했다.

울산에서 소금이 생산됐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염포(鹽浦)는 세종 때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 염포만호가 관영으로 소금으로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로는 추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염포가 모래 성분이 없는 갯벌 지대로 변하면서 자염을 생산하기에 부적합하게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대는 배로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소금 창고가 지어졌거나 소금 교역의 장소로 이용돼 그 이름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울산의 소금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소금길’이 생겨났다.

울산부 소금길, 언양 소금길, 영남알프스 소금길, 해칠방 소금길 등 소금 장수들의 발걸음은 울산에 거미줄 같은 길을 내었고, 그들은 거친 숨을 재우기 위해 범서 천상 새고개 주막, 내와리 바데주막, 삼남 깊으내 주막 등 곳곳의 주막에서 쉬어갔다.

※ 참고자료 : 「염정(鹽政)」(울산문화 11집,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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