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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景文王)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憲安王)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정강왕)·만(曼: 뒤의 진성여왕)·윤(胤)이 있다. 서자인 요(嶢)는 뒤에 효공왕(孝恭王)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비(神德王妃)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해졌다.

헌강왕대(憲康王代)는 표면적으로 금입택(金入宅)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신라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신라 하대(下代) 진골귀족(眞骨貴族)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민심이 조정으로부터 서서히 이반되는 시기였다.

헌강왕은 즉위한 뒤 불교와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국학 진흥활동은 경문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헌강왕대에 이어진 것이다. 이를 통하여 국학에 적극적이었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또한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다.

876년(헌강왕 2)과 886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望海寺)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로 추정된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해 박사(博士)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883년에는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해 문신들로 하여금 시(詩)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 신홍(信弘)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880년 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경주의 사방을 바라면서, 백성들의 지붕은 볏짚이 아닌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에 국한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 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했을 때였다. 어디에서 왔는 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또한,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망했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헌강왕이 동해로 행차했을 때 나타난 처용과 그의 가족은 왕에게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신임을 얻는다. 헌강왕은 처용이 나타났을 때 절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동해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를 지었다. 처용은 형제들과 헤어져 왕을 따라 경주로 와서 정착해 아내도 얻고 급간이라는 벼슬도 얻었다. 이때「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처용이 노래와 춤을 잘하고 용의 아들을 자처하며 역신을 내쫓았다는 것을 보면 처용은 무속적 성격을 지닌 인물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은 처용에게 안내와 벼슬자리까지 주면서 자기 곁에 두고 왕실의 안녕과 병마를 내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을 용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처용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실제로는 당시 울산 지방에 있었던 호족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처용탈의 생김이 매우 이국적인 것과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처용의 모습을 볼 때 그가 외국인일 가능성은 꽤 큰 듯하다.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에서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실제 헌강왕 시절 동해의 울주 지역은 번화한 항구였고 「삼국사기」에 헌강왕 때 보로국(여진)과 흑수국(말갈)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국제적인 교류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처용을 무역을 하러 온 아라비아의 상인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은 것이다.

헌강왕은 외교 분야에서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886년 봄에 적국(狄國)인 보로국(寶露國: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그해 왕이 세상을 떠나니 장지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마련했다.

※ 출 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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