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고래, 철새가 함께 꿈꾸던 도시 매력 넘치는 울산남구 여행
이 일대는 외황강과 울산만이 만나는 곳으로 외황강(外煌江)변의 해발 50m정도의 구릉과 평지를 포함하는 포곡식성이다.
개운포에 수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 7년(1407)의 「개운포 병선을 거느리고 삼포‥」이다.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태종 11년(1411)의 「‥개운포만호 조민로(曺敏老)가 바다의 적을 막을 만한 재질을 갖추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의 직첩(職帖)을 박탈한다.‥」라는 기사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경상도지리지』에 보면 세종 7년(1425)에도 개운포만호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24년(1493)에 「경상좌수영(慶尙左道水營)이 본래 동래현 부산포(富山浦)에 있었는데 국가의 주장이 왜인과 혼처하고 있어 거처로서 마땅하지 아니하여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다」라는 연유로 좌수영을 개운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개운포에서 동래 해운포[남촌]로 좌수영이 이전된 시기에 대하여 중종 39년(1544)과 선조 25년(1592)으로 양분되는데, 일반적으로 중종 39년(1544)로 보고 있다.
개운포 좌수영성의 평면모양은 남북으로 치우친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성지의 남서쪽은 바다로 돌출되어 수심 3m이내인 외황강과 접하고 있다. 둘레 1,264m, 면적 102,919㎡, 체성은 최대 폭 4.0~4.7m, 최대 높이 2.4m 정도이다.
한편, 추정 남문지 부근의 면석에서 「‥南村‥乙(?)未四二九‥」가, 북문지 서편의 면석에서 「‥南北村‥」이 각자된 축성관련 명문석이 확인되어 축성시점과 동원된 마을 및 거민(居民)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데, 북촌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촌은 좌수영이 있었던 동래[부산] 해운포의 지명일 것으로 보이고, 사이구(四二九)는 성을 축조한 날짜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은 「卍」,「甲」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와편이 있으며 특히 「卍」이 새겨진 명문와가 많다. 동문지 근처에서 전돌과 「밀양장흥고(密陽長興庫)」명 분청사기편이 수습되었고, 서문지 에서는 백자 굽의 안쪽에 「上」,「水」자가 새겨진 명문백자가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