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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고래, 철새가 함께 꿈꾸던 도시 매력 넘치는 울산남구 여행

무거동 옥동 신정동 달동 삼산동 야음동 여천동 매암동 장생포동 두왕동 선암동 고사동 상개동 부곡동 성암동 용연동 용잠동 남화동 황성동
신정동(新亭洞)

숙종과 영조때까지는 송정, 봉월, 팔등의 세 마을이 솔밭처럼 정립 하고 있었다. 이후 정조와 순조 때는 송정, 신정, 봉월, 팔등, 원당 으로 그리고 고종 31년과 1911년에는 소정, 봉월, 월평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이를 합하여 신정이라 하였다.

달동(達洞)

숙종 46년(1720)에 무둔리와 곶지리로 갈라져 있다가 고종 13년(1876)에는 곶지동의 달일마을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은월봉의 산아래에 자리잡은 평지마을이란 뜻에서 달동 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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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동(三山洞)

숙종, 영조때는 신리(新里)란 단일마을이었다. 정조때는 신리와 삼산, 순조때는 신리, 신복, 삼산, 신기, 중리, 고종때는 신리, 신복, 삼산, 중리로 1911년에는 신리, 삼산, 중리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부터 이를 합하면서 산봉우리가 3개가 솟아 있었다 하여 삼산이라 하였다.

무거동(無去洞)

신라 경순왕을 안내하던 동자승이 자취를 감추어 없어진 곳이라 하여 무거라 불렸다. 정조때는 무거 내리와 신복리로, 고종때는 무거동과 신복동, 삼호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면서 무거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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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동(玉洞)

옥동에는 숙종 46년(1720)에 와와리와 격동리의 두 마을이 있었다. 이후 정조때는 와와, 옥현, 격동, 갈현으로 늘어났고, 순조때는 상리가 늘어났으며, 고종때는 와와, 옥현, 상리, 격동, 갈현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면서 옥동이라 하였다.

두왕동(斗旺洞)

본래 울산(울주)군 청량면 지역으로서, 옛날 대마도주(對馬島主) 김모(金某)의 선조 무덤이 마을에 있다 하여 도왕(島王)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왕리라 개칭하고,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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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동(呂川洞)

본래 울산(울주)군 청량면 지역으로서, 옛날 대마도주(對馬島主) 김모(金某)의 선조 무덤이 마을에 있다 하여 도왕(島王)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왕리라 개칭하고,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야음동(也音洞)

야음동은 숙종때 야음리라 하던 마을이다. 이후 영조 41년(17 65)에는 야음과 대암으로, 정조때는 야음, 대암, 도산으로 순조 때는 야음과 도산으로 갈라져 있었다. 고종 31년(1894)에는 야음, 도산, 송호로 그리고 1911년에는 야음, 도산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이들을 합하면서 마을 뒷산의 모양이 이기야(也) 자 같이 생겼고 그 산에서 이기야자 소리가 난다하여 야음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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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동(仙岩洞)

선암동은 고종 31년(1894)에 선암과 명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1년부터는 이 마을에 있는 신선암에서 선인이 놀았다 하여 선암이라 하였다.

상개동(上開洞)

울산(울주)군 현북면의 지역으로서 상개라 하였는데, 1914년 명산동, 개운동을 병합하여 상개리라 해서 대현면에 편입되었 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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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동(夫谷洞)

부곡동은 본래 고안방(高安坊)이라 하였다가 고종 31년에는 현남 면의 부곡동, 화장동과 현북면의 사평동, 신안동의 4개 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1911년에는 사평, 신안을 합쳐 부곡(夫谷)이 되고, 부곡(釜谷), 화장을 합쳐 화장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여 부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성암동(城岩洞)

울산(울주)군 현남면의 지역으로서 옛날 경상좌도수군절도 사영성(營城)이 있었다. 개운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수군기지(水軍基地)가 되었으며, 조선조 말의 이름은 성내동(城內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암리라 해서 대현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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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동(古沙洞)

울산(울주)군 현북면의 지역으로서 고실 또는 고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현남면의 유곶동을 병합하여 고사리라 해서 대현면에 편입되어,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리가 동으로 되었다.

황성동(黃城洞)

황성동은 숙종때 성외리와 황암이라 하던 마을이다. 이후 영조때는 성외와 황암으로 정조때는 성외, 황암, 세죽, 장암, 지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순조때 지동마을이 없어졌다. 고종때는 성외, 세죽, 개곡으로 1911년에는 다시 성외, 천곡, 세죽, 계곡, 황암으로 세분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면서 황암의『黃』자와 성외의『城』자를 따서 황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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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동(龍淵洞)

용연동은 영조때 용소리(龍所里)라하던 마을이다. 이후 정조때는 용연, 제하로, 고종때는 용연, 용해로 1911년에는 용련, 반호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면서 가리못(加里池)에 용이 살았다하여 용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남화동(南化洞)

울산(울주)군 현남면의 지역으로서 신포(新浦)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화리라 해서 대현면에 편입되었으며,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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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잠동(龍岑洞)

울산(울주)군 현남면의 지역으로서 용잠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잠리라 해서 대현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장생포동(長生浦洞)

장생포동은 숙종, 영조때 장생포리(長生浦洞)의 단일마을이었 으나, 정조때는 창승과 구정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장승과 구미로, 1911년에는 구정(九停)이라 부르다가 1914년에는 장승과 같은 세장(細長)한 포구 또는 장승이 있었던 포구라는 데서 장생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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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암동(梅岩洞)

매암동은 숙종 46년(1720)에는 낫개(吾浦)라 하던 단일마을 이었다. 이후 정조때는 낫개, 납섬, 양죽이라 하였다가 순조때 다시 낫개라는 단일마을이 되었다. 고종때는 매호, 교암, 양죽, 양해의 4개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1911년에 매호, 교암, 대일, 양죽으로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이를 합하면서 매호동의『梅』자와 교암동의『岩』자를 따서 매암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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